2008. 3. 17.

20080203 ["우리집은 래미안입니다."]


임지영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vol.3 p.117-134 시민극의 형성



" 우리집은 래미안입니다. ”

- 인간의 사회적 욕망과 그러한 욕망이 담긴 장소



1. 계몽시대의 사회적 환경, 현대시대의 사회적 시선


지난번 본문에서 우리는 시민계급이 예술의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예술주체의 변화는 시민극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전비극과는 달리 시민극에서는 사회가 개인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물질적 현실에서 독립된 자율적인 존재일 수 있었던 고전비극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다. 물질적 현실의 지배를 받게 된 시민계급은 사회적 환경이라는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주인공에 더욱 공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사회의 함수화’는 근대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된다. 데카르트 이후 신으로부터 ‘주체’로 떨어져 나온 인간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지나오며 더 이상 사회와는 떨어져 생각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신을 벗어남으로써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는 더욱 확대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더 큰 이상적 경지를 이루고자 하는 초부르즈와적 감정을 우리 모두에게 심어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렇듯 개개인 모두에세 심겨진 초부르즈와적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를 더욱 의식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더욱이 도시에 오밀조밀 모여 살게 되면서 그러한 시선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시민극에서 대두되었던 사회적환경은 현대에 와서 사회적 시선으로 대체되어 도시 전체를 팬옵티콘(panopticon)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계몽주의 연극의 주인공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과 때놓고 생각될 수 없게 된다. 이는 현대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당시의 신분을 규정하는 기준과 지금의 기준이 달라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시대에서의 신분체계는, 확대해서 현대인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반영되는가? 물론 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소비하고 점유하는 장소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번 발제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즉 타자의 시선으로 규정된 일련의 신분적, 계급적 이미지들이 내재되어있는 장소들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안에서 얼마나 새로운 삶이 가능한지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Enjoy MIGO’s Style!



출처 : 미고 홈페이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이용하는 대부분의 재화와 서비스는 기업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기업은 철저히 자신들의 상품의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 ‘Enjoy your meal.’ 대신에 ‘Enjoy MIGO’s Style!’을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먹는 나는 샌드위치에 돈을 지불했는지, 미고 로고에 돈을 지불했는지, 깔끔하고 정겨운 인테리어에 돈을 지불했는지, 강남대로의 임대료에 돈을 지불했는지 알 수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진부하게 들릴 이야기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이느냐’ 이다. 아마 위의 질문에 가장 가까운 정답은 ‘이미지에 지불했다’ 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타자의 시선에 규정된 재화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점유하는 장소들에도 적용된다. 즉 기업들에 의해 공간들까지도 상품화되게 된 것이다. 최근 문제화 되고 있는 래미안 광고는 그러한 추세-장소의 본질의 변화- 를 잘 보여준다.


이렇듯 이미지화 된 다양한(?) 장소들은 우리의 정체성으로까지 연결된다. 어디서 쇼핑을 하고, 어디서 밥을 먹고, 어디서 커피를 마시고, 어디서 잠을 자는가 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대게는 기업이 제공해주는 이미지에 따라 장소의 성격이 규정되고 – 물론 어떤 장소가 있는 지역의 영향도 받겠지만 - 그에 따라 우리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잘 훈련된 행동방식으로 공간을 사용하게 된다. 이는 장소에 잠재된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도시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습성이다. 우리는 장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대로 지속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적응시킨다. 도시 구조 안에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광고의 권력과 더불어 진행되는 이러한 재생산은 개개인의 삶을 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따라서 대게는 기업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만큼 만 장소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보이지 않는 권력은 – 그것은 기업의 권력 이라기보다는 서로서로의 감시에서 나오는 권력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 파시스트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행동양식을 조절한다.



3 _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장소


새로운 행동방식과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공간 사용을 요구한다. 다음의 예들은 장소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행동양식이나 사고가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LIFE STYLE HOTEL


출처 : 라이프스타일호텔 홈페이지


파티 스위트 룸이나 테마모텔의 이색적인 방들은 대학생들의 MT나 친구들간의 연말파티와 같은 프로그램을 소화하면서 모텔의 기능을 확장 시켰다. 이제 모텔은 새로운 놀이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당히 서 있는 4개의 빌딩과 왁자지껄한 카운터는 ‘거리낄게 뭐야?’라고 외치며 소비자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 인사동의 찻집 ‘귀천’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옛 기차역의 대합실과 같은 배치는 나와 대화하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서로 등을 맞대고 수다를 떠는 상황을 만든다. 처음 들어가면 머쓱하지만 어느새 적응하여 서로의 주제가 섞이며 자연스레 대화의 주체가 확장되기도 한다.



4. 주체적으로 장소 사용하기


좀 더 다양한 삶이 싹틀 수 있는 장소들을 위해선 두 가지 방향의 접근이 필요하다. 일단 다른 프로그램과 장점을 내세운 장소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거대 기업처럼 이미지 메이킹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인지도가 낮은 장소들은 ‘홍대 주변’. ‘신사 가로수길’. ‘인사동길’ 과 같은 지역적 특성에 수요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도 각 지역에 수요가 많이 몰리게 되면 소수가 원하는 장소들은 임대료가 없어 곧 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근성있는 소비자의 발악(?)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가치 있는 장소들이 유지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타자의 시선의 틀을 깬 방식으로 장소를 사용할 수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서로를 감시하는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좀 더 새로운 종류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행동과 사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거대자본으로 비슷하게 매너화 된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우리 개인에게 달려 있겠다는 부담스러운 결론으로 발제를 마친다.

20080127 [오타쿠의 유투브]

이다미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vol.3 pp.55-113 새로운 독자와 관객




오타쿠お宅, オタク유투브YouTube

-파괴되는 예술창작의 경계. 진화하는 비평집단, 2인칭과 many to many의 예술.




불가에서 중생이 있듯이 폐인 세계에는 햏자가 있다. 햏자들은 열반에

다다름을 득햏이라 하는데, 이 득햏을 하기 위해 항시 수련하고 있다.
득햏 수련에는 3대 기본 수련과정이 있으니, 그것은 주침야활(晝寢夜活),
삼시면식(三時麵食), 햏언수행이다 (햏자복음 제3장).








1. 오타쿠와 디씨폐인


-예술의 개인화된 소비와 사이버공간에 대한 강박적 생활의 문화적 소비

우리는 디씨인싸이드닷컴www.dcinside.com의 ‘햏자’들을 기억한다. 이들은 디지털카메라 리뷰사이트에서 시작되어 발전된 웹사이트의 매우 세분화된 카테고리의 게시판에서 온갖 종류의 시시콜콜한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며 서로 반응의 민첩함을 다투며 긴장감을 즐기는 무리들이다. 스스로를 폐인이라 칭하며 많은 시간을 가상공간인 인터넷에 할애한 나머지 이들이 만들어낸 3대원칙은 지극히 게으르게 보내고 있는 현실세계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들 ‘햏자’들은 ‘아햏햏’과 ‘님하’와 같은 자신들만의 자극적인 조어를 서로의 기호로서 교류하며 사회적 약속체계로서 언어가 갖는 기본틀을 해체하여 사용하는데, 이들의 언어는 ‘~하오’, ‘압박하다(반응을 나타내다)’, ‘방법하다(혼내주다)’와 같이 자신을 2인칭으로 이해한 표현들을 주로 사용한다. 이러한 인칭관계는 가상공간의 익명사회 속에서의 공동체적 동일성과 친근함이 비껴 표현된 것으로, 개인들은 다수소통many to many communication의 관계 사이에 id와 비칭으로 적절히 자리잡을 수 있다.

이들의 생활은 90년대 일본에서 디지털매니아로 성장하여 대두되기 시작한 ‘오타쿠’문화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오타쿠라고 하면 표면적으로는 방에는 만화책과 캐릭터 피겨가 가득하고 엄청난 용량의 컴퓨터 하드에는 좋아하는 애니와 그라비아아이돌의 디지털영상콘텐츠가 가득한 -촌스러운 옷차림과 사회부적응 성향의- 2,30대의 남성이 연상된다. 이들은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대중매체의 하위문화에 집착하며, 그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하며 만족을 얻는다. 테크노와 애니메이션으로 집에 갇혀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던 디지털매니아들은 네트워크를 만났고, 그 네트워크 공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사회와는 뭔가 다른 행동, 이전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양식과 취향을 통해 그들은 동인집단(동호회)을 만들었고 그들만의 규범적 표상을 통해 사회 내적 존재로서 세계에 자신을 링크시킨 것이다. (‘오타쿠’를 지칭하는 일본어는 원래 상대를 높여 부르는 용어로 한국 폐인들의 ‘님하’와 매우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2. 모에현상과 패러디


-예술의 생산 소비 유통구조의 중첩과 대중화.

초기, 혹은 대부분의 동인활동을 통한 오타쿠 개인들 사이의 교류와 패러디의 시도는 원전의 기본 구조를 변형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완결된 서사의 세계 머물렀다. 이들은 서사를 열어 현실로 확장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광적으로 서사의 중심에 몰입하며 현실로부터 도피하였다. 문화소비는 범주와 장르에 한정되었으며 고작 기념판의 출시 정도로 되새김질 되거나 튀어나온 뱃살에 ‘신지’의 스판수트를 끼워 입으며 체화하는 것에 그쳤다.

오타쿠 문화의 양적 성장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유통구조에 영향을 준다. 동인지에 의한 패러디는 미디어는 주로 원전을 따르지만 서사구조가 변형된다. 이에 생긴 추상 개념으로 ‘모에(萌え)’가 있다. 이는 좋아하는 미소녀 캐릭터나 전동차와 같은 것에 가슴에 솟는 ‘훈훈함’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인데, 주로 남성향이 강한 분야에서 모에현상에 의한 팬서비스 차원의 문화생산구조가 발달했다. 만화연구가 김낙호는 이를 ‘원형적인 요소들의 파편을 긁어 모아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상향을 조합해 맞춰내는 방법’이라고 규정하는데 패러디의 목적이 개인적인 까닭으로 이를 통해 직접적인 문화의 예술적 확장을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정우의 경우 원전에의 충성과 편집증적 수집을 통해 자신만의 이상향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추상적인 자기만족의 쾌락을 획득하는 일이 오늘의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냉혹한 사실을 역설한다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3. 웹진, 블로그, 미디어아트, 하이퍼-내러티브 그리고 유투브


-이데올로기가 아닌 취향을 통한, 메시지가 아닌 미디어를 통한 스타일의 인코딩

일본 오타쿠(표면적이고 상징적으로 단순히 지칭)의 자기만족적 패러디는, 한국의 오타쿠인 디씨폐인들에 와서는 온라인 정치행위와 광장에 대한 지배 등 선동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다가, 블로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이 후로는 문화예술적 취향을 통해 더욱 다층화된다. 꾸준히 등장하는 예술에서의 미디어아트 분야의 양적 질적 성장과 함께 가상공간의 디지털문화 또한 풍요롭고 복잡하고 예민한 현실의 감성에 비교적 가깝게 다가서게 된 것이다. 링크된 웹진과 블로그들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개인들에게 지정학적 좌표를 제공하여 대중의 접근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더욱 쉽게 더 많은 것들과 교류하게 되며, 그럴수록 개인의 취향으로 무장하고자 열망하게 되었다. 선형적인 시간 위의 개인은 가상공간의 hyper-narrative를 통해 자아의 분화된 면모들을 하나의 문화체계로 재편성한다. “주체의 드라마는 객체와 주체의 이미지 난관에 봉착하면서 끝났으며, 우리는 배우나 극작가가 아니라 다층적 네트워크의 단말기에 불과하다”는 보드리야르의 언급은 전자정보시대의 다원화된 정체성multi-identity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주체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열린 서사는 디지털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핵심이 아닐까, 개개인의 실명은 무의미에 수렴한다.

우리는 여기서 미디어와 예술과의 관계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혹은 문화)과 매체 또는 예술과 테크놀로지는 미학과 예술사가 제기하는 본질적인 문제들과 닿는다. 디지털과 시청각예술의 만남은 예술 텍스트의 생산, 소비, 유통의 전과정을 비물질적인 시스템으로 재편하였다. 게다가 그 변화는 날이 갈수록 고도로 복합적인 스타일을 손쉽게 하고 있다. 웹 상의 게시판에서 함께 감상하고 리뷰를 작성하고 댓글을 달던 ‘오타쿠폐인’들은, 이제 동영상 서비스, 게시판에서 1:1채팅, 메신저 서비스와 wi-fi 무선 랩탑, 휴대폰을 기본으로 PDA와 PMP기기 등 다양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깁슨이 얘기한 바와 같은 ‘수천만이 합의하는 공감각적 환각’속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욕망의 다채로운 표출이 가능해졌으며 의사소통의 선택가능항이 확대되었다. 더구나 이 서비스들 대부분은 일방적인 예술가와 생산자에 의해 소비되는 방식이 아닌, 함께 만들거나(prosumer), 혹은 스스로 만드는(DIY)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Everyone’s a star.com”
이제 우리는 값싼 테크놀로지 덕으로 스스로 영화나 앨범, 또는 TV쇼를 만들 수 있다. 아

무리 가치 없다고 판단되는 아이디어라 할지라도, 컴퓨터는 그것을 아주 전문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컴퓨터 덕분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뭔가를 만들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테크놀로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Romesh Ratner & Joel Stein, Time, June 5, 2000




유투브닷컴YouTube.com을 필두로 한 동영상의 대중화는 옛날 MTV가 현대의 거실에 그러하였듯 인터넷의 시뮬라크라에 새로운 시청각적 활력을 불어넣는다. (비록 저작권을 훼손한 원전들이나 성-폭력을 소재로 한 상업적 영상물들이 함께 유통되고 있기는 하나) 특히 가상공간에서의 집단창작을 통한 예술의 생산과 소비의 공공성 확대는 유투브를 통해 실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유투브는 동영상을 매개로 하는 까닭으로 기본적으로 -대부분 기초적인- 메타언어로 구성된다. 이렇게 생산된 텍스트는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메시지 중심의 기존의 소통체계에서는 피드백의 가능성 즉, 댓글 혹은 패러디의 가능성이 매우 낮은 소통체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짧고 단순한 비결정적 구조를 취한 까닭으로 담론의 장에서 무한한 소통의 가능성을 가지기도 한다. 창작하거나 답을 하기 위한, 혹은 패러디를 위한 내용을 개념화 하여 하나의 영리한 스타일로 인코딩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유투브에 링크된 동영상들을 캡쳐한 것으로 daftpunk의 곡과 뮤직비디오의 구조를 다른 시각적인 기호와 제스쳐들로 패러디한 것들이다.




이러한 생산성은 하위문화의 결합이나 집단창작의 확대로 발산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류예술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진행중인 미디어 아트와 가상공간 혹은 인터랙티브의 관계는 현 시대 –아트의 대세를 이루고, 현태준(1966년생)의 국산품展은 만화가이자 장남감 수집가이기도 한 그의 오타쿠적 기질이 다분한 작업이다(아래 이미지들). 최신 영화 ‘클로버 필드’의 울렁거리는 핸드헬드홈비디오연출은 (제작비 수천만달러라는 점만 뺀다면) 유투브 그 자체 아닌가.

다만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소통구조의 문화가 예술 텍스트로서의 미학적 성과와 질을 담보할 수 있나, 하는 질문에는 아직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첫 세미나의 발제문을 얼렁뚱땅 끝맺어본다.